민법총칙 발표 조에서 대법원 판례 하나를 맡았습니다. 판결문이 열두 장쯤 됐는데, 시간도 없고 해서 그대로 복사해 AI한테 던졌습니다. "핵심만 세 줄로 정리해줘." 3초 만에 깔끔한 세 줄이 나왔고, 저는 그걸 발표 슬라이드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문제는 발표 당일에 터졌습니다. 교수님이 "그럼 이 사건에서 원고가 이겼나요, 졌나요?"라고 물으셨는데, 제 슬라이드대로면 원고 승소였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표정이 이상했습니다. 나중에 판결문을 다시 열어보니,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환송했고 결론은 제가 적은 것과 반대였습니다. AI가 요약하면서 파기환송의 방향을 뭉개고, 다수의견의 결론을 거꾸로 잡았던 겁니다. 세 줄은 매끄러웠지만 방향이 틀려 있었습니다.
이전에 저는 AI 답변을 검증하는 습관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그때는 주로 없는 걸 지어내는 환각을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요약은 결이 좀 다릅니다. 없는 걸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걸 잘못 압축하는 쪽이라 더 안 보입니다. 문장 자체는 다 진짜 같으니까요.
판례를 요약시킬 때 제가 데인 지점들
첫째, 결론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위에 쓴 파기환송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특히 원심을 파기한다, 상고를 기각한다 같은 주문 부분은 한 글자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데, AI 요약은 이 미묘한 방향을 자주 놓칩니다.
둘째, 다수의견·반대의견·별개의견을 뭉갭니다. 판례 공부에서 반대의견이 시험에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세 줄 요약을 시키면 반대의견은 통째로 사라지거나 다수의견과 섞여버립니다. 실제로 한 번은 반대의견의 논거를 다수의견인 것처럼 요약해줘서, 하마터면 정반대로 외울 뻔했습니다.
셋째, 사실관계와 법리를 구분 못 합니다. 어디까지가 그 사건의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일반화된 법리인지, 요약본만 보면 경계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 판례가 왜 중요한지(판시사항)를 놓치게 됩니다.
논문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헌법 수업 참고용으로 학술지 논문 한 편(30페이지쯤)을 요약시킨 적이 있는데, AI는 저자가 비판하기 위해 소개한 반대 학설을 마치 저자 본인의 주장인 것처럼 요약했습니다. 저자는 그 학설을 반박하려고 길게 인용한 건데, 요약본만 보면 정반대로 읽혔습니다. 판례든 논문이든, 압축 과정에서 가장 먼저 날아가는 게 누가 무슨 입장인지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씁니다
요약을 아예 안 시키는 건 아닙니다. 열두 장을 다 정독할 시간이 없을 때 지도로는 여전히 유용합니다. 다만 순서를 바꿨습니다. AI 요약을 먼저 읽어 큰 그림을 잡되, 주문·판시사항·반대의견 이 세 곳은 반드시 판결문 원문에서 제 눈으로 확인합니다. 저는 대법원 종합법률정보에서 사건번호로 원문을 열어 이 세 부분만 대조하는데, 5분이면 됩니다.
한 가지 더. 요약을 시킬 때 세 줄로가 아니라, ① 사실관계 ② 쟁점 ③ 법원의 판단(주문 포함) ④ 반대의견이 있으면 별도로, 이렇게 칸을 나눠 시킵니다. 칸을 강제하면 AI가 반대의견을 빼먹기 어려워지고, 제가 나중에 원문과 대조하기도 쉬워집니다. 논문도 마찬가지로 저자의 주장 / 근거 / 저자가 반박하는 반대 학설 / 한계로 칸을 나눠 받으면, 앞서 말한 입장 뒤바뀜이 확 줄어듭니다.
같은 방법을 세 번쯤 써보고 느낀 건, 결국 요약의 질은 프롬프트보다 내가 무엇을 확인할지 미리 정해두는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확인할 칸을 정해두면, 요약이 틀려도 어디를 펴봐야 하는지 바로 압니다.
아직도 완벽하진 않습니다. 특히 오래된 판례는 표현이 예스러워서 AI가 더 자주 헷갈립니다. 그래서 요약은 믿는 대상이 아니라 확인할 목록을 만들어주는 도구, 딱 거기까지로 씁니다.
오늘 당장 해볼 것
AI에게 판례를 요약시킬 일이 있다면, 요약본을 받은 뒤 주문(결론)만 판결문 원문에서 한 번 확인해보세요. 승패의 방향이 뒤집혀 있는지 보는 데 1분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그 1분을 아끼려다 발표에서 정반대로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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